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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사

[영화인 열전] 슬랩스틱 코미디의 황제 - 찰리 채플린 (1889~1977)

아마도 영화계가 내놓은 최초의 스타이자 천재는 찰리 채플린일 것이다.


그는 감독과 주연 뿐 아니라 편집, 음악, 제작,각본 등 영화의 모든 부분을 책임질 수 있는 올 라운드 플레이어였다. 그의 출현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서 삶의 시름과 고통을 잊고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습관을 갖게 되었으며, 그것은 결국 할리우드라는 영화산업의 메카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 할리우드는 채플린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의 존재는 마치 미키 마우스나 코카콜라처럼 하나의 아이콘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것은 조직적으로 스타 시스템을 구축해 전세계를 석권해온 미국 대중문화 전략의 첫번째 시범 케이스임을 뜻한다. 즉, 채플린은 단순한 영화 천재가 아니라 20세기 대중문화의 기본 포메팅을 제공한 하나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다.


채플린의 생애는 마치 그런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다섯살 때 이미 목이 상한 어머니를 대신해 무대에 선 것을 비롯, 거리의 악사로 경력을 쌓은 점이라던가 사춘기 시절을 코미디 배우로 보낸 것 등은 맥 세네트라는 초기 코미디 영화의 대가에게 픽업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슬랩스틱 코미디'라는 장르는 채플린을 통해 활짝 꽃피었다.


그런데 그가 다른 초기 코미디 배우와 달랐던 것은 확고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우스꽝스런 프록 코트와 배기 트라우저 복장은 하이 햇과 더불어 하나의 스타일이 되어던 것이다. 그 덕분에 그는 이미 1918년에 1백만 달러의 계약금을 받는 슈퍼스타가 되었다. 당시의 환율을 계산하면 요즘의 빌 게이츠에 버금가는 부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채플린을 채플린으로 만든 것은 역시 시대를 불문하고 모든 이를 감동시키는 명작들이다. 대공황의 애환을 표사한 "키드", 일확천금의 허황됨을 풍자한 '골드러시', 현대 기계문명의 폭력성을 고발한 '모던 타임즈', 히틀러의 파시즘을 공격한 '위대한 독재자'등은 지금 봐도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걸작들이다.


하지만 유성영화, 컬러영화 등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적응할 수 없었던 채플린은 결국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되어 미국에 입국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197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0년 만에 미국을 찾아 평생공로상을 수상했을 때 보였던 그의 침묵항의는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것은 자신이 만든 할리우드가 자신을 배신한 데 대한 항의였다.